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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문학독서록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2024년 3월 1일)

by 역사는여쌤 2024. 3. 24.

 

우리나라가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만세 시위를 했던 역사적 기념일 3월 1일.
나는 한 역사 인물이 흔적을 찾아 목포를 떠나
강진으로 향했다.
강진에는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의 유배지이자
다산초당에서 많은 제자들과 책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흔적을 찾아 떠난 것이다.
 
강진 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 버스를 타고
다산초당으로 향하였다.
농촌은 봄날을 준비하듯 녹색의 모습이 많이 보였으며
많진 않지만 꽃들이 펴 있는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이날은 강풍이 심하게 불었다.
강풍주의보라는 문자도 와 있었으니 말이다.
먼저 다산 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은 정약용 선생의 일생과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산은 정약용 선생의 다른 이름인데
차 나무로 가득한 산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의 인생을 시간 순으로 알려주고, 그와 관련하여
저술한 책들도 소개가 되어있는데 
그가 남긴 책들만 해도 50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다산 초당에서 많이 저술하였다고 하는데 
정약용도 열심히 연구하고 책을 썼지만
강진에서 인연을 맺은 
제자들이 힘껏 도왔다고 전해진다.
 

 

503권의 저작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법, 경제, 사회, 수사, 기하학, 농업, 건축,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책들도 남겼다.
그리고 형인 정약전에게 안부를 주고받은 글,
부인인 홍혜완이 보낸 편지,
두 아들에게 주고받았던 편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적어 시집간 딸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을 통해 정약용은 가족
또한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다는 것을 느낀다.
천주교와 관련된 집안이라 일찍이 서양 문물과
학문(서학)에 관심을 갖고 받아들여 
배다리 건설, 수원 화성 건축을 담당했던
정약용.
 

정권이 바뀌자 고된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이곳 강진에 다산초당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제자들과 대화하고,
차를 마시고 천일각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정약용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